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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돌로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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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5-04-13 08:46 조회 5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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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갔던 여성들이 돌아왔는데 이를 ‘환향녀’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환향해서도 청나라에서 정조를 잃었다는 슬픈 과거로 희비가 엇갈려야 했습니다.

딸들은 집에 들였는데,, 부인이나 며느리는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향녀는 이때부터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여인을 향한 비난의 말이 되었습니다.

 

1) 간음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 했으나 간통, 사통, 음행 등은 부정한 상대와의 성관계로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다 이를 금

지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여전하고 우리나라는 되레 간통죄 폐지도 되었습니다.

또 그 역사는 구약에서도 동성애와 함께 기록되었기에 주님 오실 때까지 존재할 듯합니다.

문제는 발각되었을 경우 여성만이 비난을 받는 일은 모순입니다,

요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이 여성의 음행 동기나 인적사항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수치심은 가득했을 것임은 짐작합니다.

만약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동생이나 딸이어도 이처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했을까요?

 

굳이 원통한 위안부를 소환하지 않아도 본의든 타의든 이런 여성은 많았습니다.

미군들을 상대했던 여성들은 ‘양색시’라 했고,

일본에 가서 술을 따라야 했던 여성들은 ‘주전자 부대’ 라고 했습니다.

곤혹스런 시대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훗날 그 혜택을 입은 가족들 마져 외면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외국도 그랬습니다.

소련이 붕괴될 때 경제난으로 여성 스스로가 옷을 벗어야 했는데 서방세계가 놀랐습니다.

당시 영화로도 이 상황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는데 ‘인터 걸’이었습니다.

북한은 없나요? 다녀온 사람들과 탈북민들의 진술이 의하면 역 앞에는 “꽃을 사세요” 하는 은어로 호객하고,, 집으

로 들이면 가장은 집을 비워준답니다.

 

이런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면 다 알고 다 겪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도록 성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생육하는 일 외에 쾌락만 추구하는 방편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출산율은 줄어도 음행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십대부터 죽기 전 짝 없는 노인들까지 약을 먹으면서도 이 쾌락을 찾으니 산업이 되었습니다.

고아원의 유래가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이유의 고아를 거두는 목적이었지만 특히 자신들의 아이들을 거둘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일본이나 네덜란드처럼 양성화를 하자,, 우리처럼 음성화를 해야 한다,,

이유도 많고 말도 많지만 여전한 딜레마이기에 자신의 양심과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2) 먼저 돌로 치라

그러나 양심은 진작에 화인 맞아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이라는데 도리가 없고, 시대정신도 어두

워져 불감증에 거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음행한 여자를 대하고 있지만 어떤 권위나 직책이 없는 주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했을 때,,반감을 갖고 대들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떠났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얼마나 희망적인가요? 또 인간적인가요? 얼마나 진실적인가요?

요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무엇보다 이들을 데리고 왔던 종교지도자들도 떠났으니 가히 양심적이고 종교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모습이 잃고 있습니다.

대통령탄핵 후에 교회가 “다시 회개하며 통합에 힘쓰자” 했더니,, 자기네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서 공격하고, 서울

대총장이 “용서하자” 는 취지로 글을 썼더니 사납게 공격하고, 계엄해지를 발 빠르게 조치한 국회의장이 개헌을 논

하자 또 공격하는 등,,

 

마치 벌떼 같고 사납기도 하니 무슨 의견이 소용이 있을까요?

정의와 인정은 어디에 있나요? 그렇다면 희망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또 신앙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양심의 가책 아닌가요?

헌법도 좋고, 주님의 말씀도 좋고, 뗏법도 좋다지만 양심의 가책이 제일 아닌가요?

 

중국이 공산당이 지배하면서 문화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을 죽이고, 이웃이 이웃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공산당이 등소평 시대에서 개혁개방을 했습니다.

과거 문화혁명의 앞잡이들은,,그때의 스승을 죽인 제자들은,,

이웃들을 죽인 이웃들은 여전히 함구하고 있습니다.

용기는 앞장 서는 것만이 아닌 훗날에 용서를 구하는 일도 있습니다.

주님이 이 여성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요8:11)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정죄하지 않는 은혜를 먼저 주시고 “죄를 범하지 말라” 는 계명을 주셨지만,

우리식 버젼이라면 “과거는 묻지 않을 테니 다시는 실패하지 말라” 입니다.

여인이 돌아가면 음행 죄는 아니라도 여전히 범죄하고 또 다짐했다가 또 범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나 이웃에게 사죄하고 자백하는 일에 실패하지 말고,,

나아가 남의 잘못도 그처럼 용서하는데 실패하지 말라는 뜻인 줄 믿습니다.

 

3) 몸을 굽이사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도 있습니다.

주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음행 중에 붙잡힌 여성을 당당하게 끌고 온 이들 앞에서 주님은 번거롭게 몸을 굽혀 손가

락으로 땅에 쓰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요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무엇을 쓰셨을까요? 십계명을 쓰셨을까요? 아님 이웃사랑이라 쓰셨을까요? 모릅니다.

성경은 이 글을 생략했기에 우리는 몰라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땅에 무언가 쓰고 계신 일은 음행 중에 붙잡혀 온 여성을 향한 배려로서 시선을 마주치기 보다는 낮

추어서 땅을 본 것은 아닐까요?

또 주변사람들도 그렇게 유도하시고자 두 번째 땅에 쓰신 것은 아닐까요?

이런 뜻으로 믿으면 어떨까요?

주님이 모두에 대한 배려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가장 비참함이 가장 큰 자비를 얻은 사건이라서 그렇습니다.

 

눈길을 시선이라 합니다.

그 눈길의 멈춤 점인 시점을 따라 똑바로 보는 정시,, 혹은 평시가 있습니다.

당당하게 상대방을 보는 눈길입니다.

 

또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앙시가 있습니다.

보는 이가 굴종이 느껴집니다.

그 반대는 부시,, 위에서 아래를 내려 보는 시각입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리거나 젖히는 앙부(추앙할 앙, 구부릴 부)의 시각이 있습니다.

거만하게 대상을 얕보면 경시와 오시며 심해지면 멸시나 천시에 이릅니다.

 

높낮이는 임의로 바꿀 수 있기에 시선 보다는 시점된 상을 옳게 파악하는 시력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 중

요한 것은 근시, 난시, 원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불시,,즉 땅을 보셨지 여인이나 종교지도자나 무리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연출자는 이 장면에 신경을 써야 할 듯합니다)

 

결론) 간음하다 붙잡힌 여성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는 나라고 보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다는 세상을 더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완전한 승리는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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