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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부라와 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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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26-10-11 09:31 조회 2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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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개최했던 2026 아시안게임이 끝났습니다.

많은 국가와 선수의 이름이 오고 내렸습니다.

이 모양에서 이름에도 국경과 등급이 있음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1) 성경의 이름

성경에도 이처럼 많은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시 등급이 나누었는데,, 한 때에 불리었던 이름이 있고, 지금도 불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겉을 보는 사람의 안목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이 다른 등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에서도 부자는 유명한 듯해도 그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주님도 부르셨고, 우리도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일부를 헌금함에 넣었지만 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어,,전 재산을 드림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칭찬들은 과

부,, 누가 더 잘 살았던 걸까요?

 

오늘도 그렇습니다.

애굽의 통치자는 제국의 황제였으나 ‘애굽 왕’ 또는 ‘바로’ 로 기록되었지만 실제 그의 이름은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나 산파들의 이름은 기록되어있습니다.

출1:15) 애굽 왕이 히브리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 차이를 아시나요?

롬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함이라

그렇다면 이들은 스스로 차별을 당하게 산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고도 명백한 사실인데 여러분이 찾아보십시오.

출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

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출1: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

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바로는 자칭 죽이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다루고 죽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죽였을까요?

특히 아들만 죽이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민족의 미래가 없게 한 잔인한 정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모습이 마귀의 궤계이고 노예 짓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바로가 악랄한 살인죄가 면피가 될 수 없습니다.

가롯 유다가 주님을 은 30냥에 판 일 역시 그의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만행은 지금도 몇몇 독재정권과 공산국가에서 여전합니다.

하나님은 모르셔서 침묵하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위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시는 줄 믿습니다.


2) 죽이는 자의 이름

꽃이나 동물은 화려하면 할수록 독이 있습니다.

그 화려함으로 상대를 유인하고 마침내 숨겨진 독으로 상대를 죽입니다.

일종의 마귀로부터 온 나쁜 은사입니다.

요10:10) 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그러므로 결국 남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정치보다는 종교에 있고, 기독교에서는 더 많습니다.

타종교보다 기독교에 이단사이비가 많은 이유는, 생명을 주는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점을 아시나요?

쉽게 벌고, 많이 번다는 유혹을 물은 것은 일종의 탐심이 작용한 탓입니다.

이단 사이비도 마찬가지로 현상만 보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이 그렇고, 상한 냄새를 따라 꼬이는 쇠파리들이 그렇습니다.

진리는,, 특별히 주님을 따르는 일은,, 주님의 말씀대로 찾는 이가 적은 협소한 길입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기에 일확천금이나 만사형통이 당장에 임하지 않습니다.

되레 믿을수록 더 작아지고, 낮아지고,

주님이 커지고 더욱 공경하게 되는 세상반대의 현상이 있습니다.

이때 성도는 행복 보다는 거룩을 추구하고 또한 당장 보다는 미래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죽이고 올라서는 일은 없고, 스스로 죽고, 또 비우려고 애씁니다.

거듭난 성향 자체가 남을 밟고 일어서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곧 보이는 주님이라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하물며 자신과 좀 다르다고 해서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신이 살겠다고 어린아이를 죽이라는 발상과 명령은 없습니

다,

 

인류의 역대 성군들을 보십시오.

부하와 백성을,,그리고 원수들에게도 온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족속이 있습니다.

바로가 그렇고, 옛 청나라와 임진왜란과 2차 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와 일본제국주의 등,

바로와 같은 족속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일정합니다.

잠24:17~18)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

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3) 살리는 자의 이름

애굽 왕과는 전혀 다른 하찮은 히브리산파들을 보십시오.

출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기들을 살린지라

어마어마한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남자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설령 자신들이 죽어도 아기들을 살리는 일에 전념한 것입니다.

이는 여성본능인 어머니의 마음만이 아니고 전문산파로서의 윤리만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 정신도 맞습니다.

산파들이 이랬던 가장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이었습니다.

믿음이 성숙한 모습으로, 성숙할수록 너나 할 것 없이 나타나는 하나님 경외함입니다.

 

경외란 곧 두려워함과 사랑함이 겹쳐 있는 공경인데,

모방할 수 없는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의 경배이고, 고백이며 찬송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에게서 많이 실종된,, 경건의 모양만 남긴,, 그러나 회복해야 할 능력입니다.

 

유감되게 성도라면서 하나님만 두려워할 수는 있습니다.

이 특징의 삶은 늘 긴장되어 있는데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직 몰라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사랑의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자유분방한데,,역시 거룩하신 하나님을 몰라 자유가 방종이 됩니다.

이는 성경적 믿음도 아니고 성령이 주시는 경건도 아닙니다.

엡5:8~10)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

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아직은 우리가 날마다 살고 있습니다.

대체로 자신과 당장을 위해 믿노라 하므로,, 그러다 보니 살았으나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우리처럼 연약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남달라 행동도 달랐습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이 믿음으로 바로의 명령을 거부했어도 죽지 않은 산자가 되었고,, 결국 민족도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상급을 이 땅에서도 받았습니다.

출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결론) 우리는 살리는 사람, 그 믿음이 되어야 할 주님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주님을 다시 음성을 듣고 따라 자연도, 사람도 살리는데 힘씁시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죽어도 다시 살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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