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HOME · 설교&칼럼

죽기에 이르도록 2 > 목사님칼럼

죽기에 이르도록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5-04-07 13:00 조회 3,591회 댓글 0건

본문

약 10년 전에 중국 연변에서 세상을 떠난, 조선 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이었던 김 학철님에 대한 소감이다.
독립투사였던 그는 우리에겐 생소했어도 중국에서는 영웅이었다.
그가 항일 전투한 고장의 소학교에서는 그를 노래로 가르켰고 그와 대원들이 거주하던 곳은 보존되었다.
그는 이곳 전투에서 다리의 총상을 입고 일본으로 끌려가 5년간 징역을 살았다.
고통 중에 그는 다리 치료는 고사하고 절단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치료조건으로 그의 전향서를 요구했어도
전향서를 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뼈가 썪는 고통을 감내했고 출옥 후에야 비로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다리 절단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다리를 잃게 한 일본을 원망하지 않은체, 다리 절단을 해 준 일본인 의사를 평생 고마워했다.
이때 부터 그는 외다리로만 살게 되었다.
해방 후 그는 사회주의를 신봉한 탓과 고향이 원산인 탓에 이북으로 귀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김일성 독재를 본 후 이상적 사회주의의 불가능을 깨닫고 두만강 건너 연변에서 살았다.
그러나 또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의 독재를 보고 비판한 것으로 14년의 징역을 살았다.

어느덧 중국과 한국의 수교로 이어진 관계로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였다.
한국에서 그를 반기는 쪽은 오히려 보수쪽이었다.
강연을 다니고, 독립운동가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가짜가 많음을 알고 가짜 색출에도 일조했다.
그는 진정한 독립운동가요, 항일투사였지만 독립유공자로써 신청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보상을 바랐던 일이 아니었기에, 자칭 인권운동가로 변신하여 그처럼 불리워지길 즐거워했고
배운적 없는 글이지만 뛰어난 저술활동으로 뜻을 펼쳤다.

우리의 적십자병원에서 그가 독립운동가인 것을 알고 무료 종합검진을 후원했지만, 그만 위 내시경검사에서
천공이 생겨 다시 수술하고 등, 그는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연변으로 되돌아 갔다.
병원생활이 징역생활 같아 답답하다면서,

그리고 몇개월 후, 스스로 곡기를 끊고 절명했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어루만지는 부인을 향해 "이것도 운명이야" 하며 병원의 실수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사회에 폐끼치고 싶지않고 주변에도 그러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뼈는 고향 원산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도 남긴 채,

우리네 방송사가 그를 찾은 때는 마침 그가 곡기를 끊은지 12일째 된 날이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숨가쁜체로 인사하고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한 ~12일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며칠 더 걸리네요"

난 그의 사상이나 신념이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찾아 본 3.1절 특집 TV 방송에서, 그 낯선이에게서 신념 굳은 모습을 본 것이다.
그의 아들의 이름은 '해양'이었다.
자기 고향을 품은 소원이었다.

누구나 신념을 말하고, 성도는 신조를 말하지만 그처럼 산다는 일은 여간 일이 아니다.
용두사미가 되거나 작심 3일이 되어, 결국 기분따라 가거나 생활따라 가기 쉽상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따라 평생을 살았다면, 또 죽는다면 얼마나 큰 은혜일까?
옛사도들과 선혈들과 우리나라 초기의 선교사들과 일제와 공산당에 맞선 성도들을 가늠해 보았다.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김 학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