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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끄적이던 목회자칼럼이 '500회'가 되었습니다.
지난 12년간의 추억입니다.
누구는 책으로 발간하라고도 했지만
이런 류는 읽히지 않는 바를 잘압니다.
나혼자의 주관이고 감상이고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내 만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홈피에 올리면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크리스챤 연합신문사는 한 번의 그 어떤 광고도 내주지 못했는데
의리있게, 그리고 꾸준하게 골라 실어주었습니다.
이 덕에 '칼럼니스트'라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불리워지거나 사용한 적이 없는 영예지만,
크리스챤 연합신문사에 꽃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소감을, 푸념을, 그리고 말도 않되는 주장을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들은 말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중에도 기록했던 '기록자'였기 때문이랍니다.
기록은 성찰을 의미하기에 그 어떤 전략가도 이런 기록자를 이길 수 없답니다.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말을 아들에게 했더니 "이조실록을 남긴 조선은 왜 망했나요?" 했기에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생각해 보았습니다.
후에 난중일기와 이조실록의 차이를 알았습니다.
승리와 망함의 차이일 듯합니다.
본인이 기록한 것과 사관이 기록한 것의 차이 입니다.
'성찰용'과 '보관용'의 차이 아닌가요?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대략적 사건은 달력에 기록하며 묵은 달력을 보관 할 뿐입니다.
이런 칼럼은 성찰용도 못되고 보관용도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요? 언젠가 언급했듯이 '날숨용' 일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이라지만 목회만이 아닌 온갖 사소함이 진솔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밝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 신앙을 알려면 설교란를 보시고, 내 꼬락서니를 볼려면 칼럼란을 보시라고,
생각해 봅니다.12년 전을,
아이들은 어렸어도 머리카락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은 목회같았지만 교회가 생활을 살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선교사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않았고,
복음에 대한 가슴은 지금보다 더 뜨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목회매너리즘'에 빠지지않도록 각성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꿈 같은 과거입니다.
칼럼에는 대나무 같은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있었기에 성장이든 성숙이든 오늘이 왔습니다.
칼럼에는 한숨도 있습니다. 장탄식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관찰도 있고 고백도 있고 어쭙잖이 모방한 습작시도 있습니다.
500회, 남들이 없는 나름의 별난 기록이기에 좋습니다.
통장에 500만원 잔액있을 때 보다 나은 기분입니다.
이 가을에 또 심기일전해서 시작합니다.
시144: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지난 12년간의 추억입니다.
누구는 책으로 발간하라고도 했지만
이런 류는 읽히지 않는 바를 잘압니다.
나혼자의 주관이고 감상이고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내 만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홈피에 올리면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크리스챤 연합신문사는 한 번의 그 어떤 광고도 내주지 못했는데
의리있게, 그리고 꾸준하게 골라 실어주었습니다.
이 덕에 '칼럼니스트'라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아직 한 번도 불리워지거나 사용한 적이 없는 영예지만,
크리스챤 연합신문사에 꽃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소감을, 푸념을, 그리고 말도 않되는 주장을 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들은 말입니다.
이순신장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중에도 기록했던 '기록자'였기 때문이랍니다.
기록은 성찰을 의미하기에 그 어떤 전략가도 이런 기록자를 이길 수 없답니다.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말을 아들에게 했더니 "이조실록을 남긴 조선은 왜 망했나요?" 했기에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생각해 보았습니다.
후에 난중일기와 이조실록의 차이를 알았습니다.
승리와 망함의 차이일 듯합니다.
본인이 기록한 것과 사관이 기록한 것의 차이 입니다.
'성찰용'과 '보관용'의 차이 아닌가요?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대략적 사건은 달력에 기록하며 묵은 달력을 보관 할 뿐입니다.
이런 칼럼은 성찰용도 못되고 보관용도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요? 언젠가 언급했듯이 '날숨용' 일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이라지만 목회만이 아닌 온갖 사소함이 진솔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밝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내 신앙을 알려면 설교란를 보시고, 내 꼬락서니를 볼려면 칼럼란을 보시라고,
생각해 봅니다.12년 전을,
아이들은 어렸어도 머리카락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은 목회같았지만 교회가 생활을 살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선교사로 가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않았고,
복음에 대한 가슴은 지금보다 더 뜨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목회매너리즘'에 빠지지않도록 각성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꿈 같은 과거입니다.
칼럼에는 대나무 같은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있었기에 성장이든 성숙이든 오늘이 왔습니다.
칼럼에는 한숨도 있습니다. 장탄식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관찰도 있고 고백도 있고 어쭙잖이 모방한 습작시도 있습니다.
500회, 남들이 없는 나름의 별난 기록이기에 좋습니다.
통장에 500만원 잔액있을 때 보다 나은 기분입니다.
이 가을에 또 심기일전해서 시작합니다.
시144: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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