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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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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9-06 14:24 조회 4,7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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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좀 달라졌다고는 하나 한낮에는 여전히 눈부신 채 덥습니다.
방금 아내랑 86세를 맞이하신 어머니생신 차림 사러 시장을 다녀왔습니다.
백수의 여유로움입니다.

생선가게 아낙네는 “이렇게 서서 장사를 30년 했더니 허리와 무릎이 다 나갔다.”며
인상을 쓰며 낯선 나에게까지 푸념을 했습니다.

빼닮은 모자가 파는 튀김좌판 집은 “그래도 한여름보다 견디기가 쉬워졌다.”며
70세가 가까울 그 어머니가 미소 지었습니다.
같은 시장, 같은 통로인데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오늘 내 스마트폰에 온 첫 문자는 친구 어머니의 부음소식이었습니다.
청년시절에 서너 번 뵌 적이 있던 어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간간히 안부를 확인했었지요.
일찍이 공군장교와 결혼해서 네 아들을 낳아 잘 키우다가 중년에 이혼한,
그 후 이혼한 큰 아들집에서 산, 키도 큰 멋쟁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80세를 넘기지 못한 생애가 암으로 마감한 것입니다.
어젯밤에도 친구는 무슨 감동의 동영상을 내게 보내준 것을 볼 때
어른의 별세조짐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전화를 하니 친구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중이랍니다.

친구와 나는 이 시각 희비가 엇갈립니다.
친구는 어머니 장례 차 상경하며 나는 어머니 생신 차 시장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글을 쓰노라니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차표 한 장 들고... 너는 하행선 나는 상행선...”
또 누가복음에 기록된 나인성의 두 행렬도 연상됩니다.
죽은 청년을 따라 장례 차 성 밖으로 나가는 슬픈행렬과
주님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오는 제자들의 생명행렬,
주님은 이 슬픈행렬을 간과하지 않은 채 죽은 청년을 살리어 슬픈행렬이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여러 희비가 엇갈립니다.
다수는 죽거나 살거나로 크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같은 병원일지라도 분만실의 울음소리와 지하 장례식장의 울음소리는 다릅니다.
찾는 이들의 표정도 옷맵시와 걸음도 나름 다릅니다.

죽은 이는 한때 우리네와 함께 살았던 이입니다.
사는 이는 언젠가 죽어 묻히거나 납골당에 안치될 것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요.
살아서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떻게 사냐?
어떻게 죽느냐? 가 관건입니다.
사실 얼마나 살았느냐?는 대단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온 세상의 산 이들은 여기에만 초미의 관심을 갖습니다.
삶이 좋아서가 아니라 죽는것이 두려운 까닭일 것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손은 여러 번 씻고 거울도 자주 볼테지만
이처럼 정녕 죽거나 사는 일에 유념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를 초월한 관심이어야 합니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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