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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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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8-09 19:29 조회 4,75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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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변에서 "살만했었다." 했을 이들의 부음을 메스컴을 통해 알았습니다.
한 분은 90세를 훌쩍 넘긴 재미 사업가였는데,
가난한 조국을 위해 미국사회에서 로비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탓에 미국에서 징역을 살고 흑석동에서 쓸쓸히 살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독 마음이 갔습니다.
일찌기 미국에 건너가 갖은 고생끝에 성공한 큰 사업가였지만
그의 죽음에는 애국했던 그 조국도 없었고 가족조차 나중 찾아와 슬퍼한 것 같습니다.

다른 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이었습니다.
영남지역의 손꼽혔던 사업가였지만 그만 60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시골출신이 대통령의 후원회장이 되기까지의 입지적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그 역시 대통령의 후원인 탓에, 징역을 산 후 뇌종양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부인 역시 사경을 헤매는, 병색이 깊다니, 인생의 허무를 갑절로 봅니다.
이제 그의 모아 논 재산은 누구의 몫이 될까? 저으기 궁금합니다.
한 때의 대통령후원회장이기 보단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후원회장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며 자문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중년의 여성 탈렌트인데, 자살함이 몹시도 안타까웠습니다.
나와 동년배였기에 연민이 갔습니다.
생활고인지 앞서 사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의 우울증인지 모호하지만 그녀의 죽음도 안됐습니다.

이 분들의 삶과 년수는 다르고 죽음의 모양이 달라도 지금은 동일합니다.
이제는 '고인'입니다.
점차로 잊혀지는 '저 세상의 사람들' 입니다.
여기서 죽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작은 교훈을 얻습니다.
여하한의 삶의 평가는 죽음입니다.
빈소의 크기나 조문객의 방문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들의, 산자들의, 평가입니다.
곧 '역사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아주 두렵지만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나의 평가는 평소의 내가 만들어 낸 작품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나의 '죽음지식'이 만들어 냅니다.
 
더러는 망함으로 알고 두려워 하며, 더러는 끝남으로 알고 대수롭게 치부하며
더러는 영생으로 알고 맞이합니다.
이 차이는 너무나 커서 삶의 모양을 전혀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런 의미로 볼때, 90세의 재미 사업가든, 60세의 대통령후원회장이든
중년의 중견 탈랜트든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있거나 더 살았거나 더 누렸거나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지금은 나이도 재산도 성별도 권세도 무의미합니다.
벌써 무덤에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각기 다른 인격체의 각기 다른 고유한 삶이 왜 같게만 보일까요?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같은 죽음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삶이 누구에나 각기 열려 있고, 죽음도 누구에나 각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도 죽음도 획일적입니다.
생김은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배경도 다른데, 천양지차가 아닌 일률편향입니다.
신기합니다.

숨 쉬는 오늘은 죽음이 멈춘'사망유예'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종말의 때에 '사망선고'됩니다.
이 때에는 항소도 상소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만 상기해도 다른 삶의 '바른 주인공'으로 살 듯 합니다.

죽음은 만인에게 공평한 '최후결정'이라지만, 내몸 묻힌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가치추구'와
저편 천국을 확신할 '복음신앙'은, 살았던 많은 사망유예의 날들을 최소한의 정의나
남을 위하는 작은 자비의 때로 만들겁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 살고 더 살고, 더 갖고 더 붙잡고에만 밤낮으로 매달립니다.
남은 날을 계수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과 그 심판은 귓등으로 흘리고 정의와 이웃의 신음은
눈 감고 긍휼도 없습니다.
보이는 잠깐의 영광과 만져지고 느껴지는, 사그라지는 '세상안개'에 취하고 있습니다.
100년도 못사는 존재들이, 죽음을 이기며 사는 실세인 냥, 혹은 천사처럼, 겁없이 살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습니다.
눈 조금만 크게 뜨고 여러 빈소나 부음에 유심하면 타인의 죽음에서도 체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영광되지 않고는 진정한 영광이 아니고 죽음으로 부유하지 않고는 진정한 부자가 아니며
죽음에 위풍당당하지 않고는 허세입니다.

모두가 이 날을, 종말을, 사망선고를 향해 오늘도 달려갑니다.
누구는 외제 차 타고 뛰뛰빵빵하며 달려가고, 새치기하며 달려가고, 루이비똥 가방들고 달려가고,
샤넬 향수뿌리며 달려가고, 아르마니 양복입고 달려 갑니다.
걱정근심 속에서 달려가고, 피 터지게 부부싸움하며 달려가고, 순대팔며 달려가고,
양로원에서도 달려 갑니다.
잠시 후 비로써 살았던 그 사망유예의 날들의 진위가 결정되며 보이지 않던 저편 세상에 관한
입성이 판가름 납니다.
각자 열심히들 사십시오.
추구하는 대로, 믿음대로, 신념대로, 멋대로, 생긴대로 사십시오.
사망유예의 날이 사망선고서를 작성합니다.
그럼 그 때에 뵙겠습니다.

전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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